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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

[서울 가볼만한곳]국립고궁박물관에서 만나는 <헝가리 왕실의 보물> 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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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상설전시 외에도 많은 특별전이 열리는데, 국립고궁박물관 지하 1층에서는 작년 12월 3일부터 올해 3월 9일까지 <헝가리 왕실의 보물> 특별전이 열리고 있어요. 









 헝가리 국립박물관과 국립고궁박물관이 공동 개최하는 <헝가리 왕실의 보물> 특별전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를 통치했던 17~19세기의 화려한 헝가리 왕실의 보물들이 소개되는데, 헝가리는 서유럽의 가장 동쪽이 위치해 있어서 주변 강대국의 침략에 맞서 끊임없이 싸워 왔으며 세계대전과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굴곡진 근현대사를 겪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와도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고 해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는 <헝가리 왕실의 보물> 특별전은 그동안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헝가리의 역사와 합스부르크 왕가와 헝가리 귀족들의 화려한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거에요. 





 <헝가리 왕실의 보물> 특별전이 열리는 전시장에 들어가자마자 사람들이 한 곳에 몰려 있었는데, 모두 '신성한 왕관(Szent Korona)' 또는 '성 이슈트반 왕관'이라고 불리는 이 왕관을 보기 위해서였어요. 

 헝가리 왕들은 12세기부터 대관식에서 이 왕관을 착용했고, 왕관은 1256년부터 '신성한 왕관'이라고 일컬어졌으며, 이 왕관은 헝가리 민족주권의 상징으로 오직 대관식에서만 착용되었는데, 대관식에서 이 왕관을 착용하지 못한 왕들은 정당한 왕으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해요. 

 신성한 왕관은 여러 차례 옮겨지고 도난을 당하기도 했으며, 제 2차 세계대전 때에는 이 신성한 왕관을 소련군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미군에게 위탁했다가 1978년 지미 카터 대통령에 의해 반환되었다고 해요.

 이 신성한 왕관은 그 가치도 엄청나지만 그보다도 헝가리 왕국을 상징하는 상징물로서의 가치가 더 크다고 할 수 있어요.  





 아래 두 장의 사진에는 1790년에 신성한 왕관의 귀환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헝가리 국민들에게 있어서 왕관을 되돌려 받은 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이 시기에 제작된 부채들에는 왕관의 반환과 관련된 그림이 그려진 경우가 많았다고 해요. 











 왕실의 상징이란 작품으로 1790년에 왕관이 헝가리로 다시 돌아온 것을 기념하여 제작한 판화에요. 





 아래 사진은 왕실의 상징이란 작품으로 오스트리아의 궁정화가인 에두아르드 구르크가 대관식의 왕실 의장인 왕관, 홀, 보주, 검 등을 그린 석판화에요. 







 아래 사진은 마리아 테레지아를 그린 것인데, 그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6세의 장녀이자 유일한 직계 자손으로 1740년 왕위에 올랐으나 바이에른, 프로이센과 같은 유럽 열강이 이 상속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바람에 8년 간의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을 벌인 끝에 그녀의 남편인 프란츠 1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인정받게 되었다고 해요.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녀를 16명이나 두었는데, 그 중 요제프 2세, 레오폴드 2세가 황제로 즉위하였고,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가 되었다고 해요. 






 아래 그림들은 엘리자베트 왕비를 그린 것들인데, 그녀는 17세의 나이에 합스부르크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결혼했으나 자유분방한 성격의 왕비는 보수적이고 엄격한 왕가에서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였고, 이에 대한 반발심으로 헝가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요. 엘리자베트 왕비는 헝가리어와 문화를 배우면서 많은 시간을 헝가리에서 보냈으며, 그녀의 헝가리어 선생이자 친구인 이더 페렌치의 영향으로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헝가리와의 평화 협정을 체결하도록 설득하였고,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건설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해요. 





 위쪽에 있는 사진은18세기 당시 헝가리 여성들이 신었던 신발이며, 왼쪽에 아래에 있는 사진은 헝가리 기혼 여성들의 모자인 보닛이고, 오른쪽 아래에 있는 사진은 헝가리 미혼 여성들이 착용했던 머리장식인 파르터에요. 






 헝가리 귀족들은 자신들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화려하고 품위있는 복식에 관심이 많았으며, 그에 따라 헝가리의 복식문화는 귀족들을 중심으로 발달하게 되었어요. 16세기에는 평민들의 귀족 복식 모방이 도를 넘어서자 귀족들이 강하게 반발하였고, 17세기에는 사치를 금지하는 규제가 실시되어 사회적 지위에 맞게 옷을 입도록 하는 법령이 선포되기도 했어요. 이 시기 헝가리 귀족들은 평민들과 비슷한 형태의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지만 색, 품질, 장식 등으로 차이를 두려고 노력했어요. 19세기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압제정책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귀족들은 기존 헝가리 농민들의 전통 민속 복식을 모방하기도 했다고 해요. 












 아래 사진 왼쪽은 헝가리 부총리였던 차키 요제프 백작의 어린 시절 초상화이고, 오른쪽은 그의 부인인 차키 언너의 어린 시절 초상화인데, 초상화 속 두 사람의 모습은 실제 나이보다 훨씬 더 성숙하게 그려졌는데, 이는 인물의 개성보다는 사회적 지위를 부각시켜 그렸던 당시 초상화 스타일의 유행을 따른 것이라고 해요. 






  아래 사진은 헝가리 귀족들의 정찬에 사용되었던 식기들로 테이블을 차려놓은 것인데, 한눈에 봐도 상당히 고급스러우며, 귀족들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테이블 앞에는 헝가리 귀족들이 사용하였던 각종 식기류도 전시되어 있는데, 역시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모습이에요. 





 국내외의 전란이 잦았던 17~19세기 헝가리의 왕과 귀족들은 전장에서의 승리를 기원하고 용맹함과 부를 과시하기 위해 몸에 항상 무기를 장식하고 다녔는데, 이러한 무기들은 대부분 진귀한 보석으로 꾸며졌으며, 오랜 전쟁의 역사에 걸맞게 갑옷도 다양하게 발달하였다고 해요. 

 헝가리 왕실과 귀족들은 다양한 화약 무기도 사용하였는데, 18세기에는 권총과 사냥용 소총이 가장 유행하였으며, 19세기에도 왕실과 귀족들 사이에서 사냥의 인기는 계속되었는데, 이러한 사냥용 소총은 귀금속과 상아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고 해요. 






 헝가리가 세 개의 나라로 분할되어 있던 시기에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군주 베틀렌 가보르는 나라를 안정시키고 헝가리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는데, 그는 헝가리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자 30년 전쟁에 신교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고 해요. 이 전쟁에서 트란실바니아는 군사적으로 열세였지만 뛰어난 지략과 용맹함으로 무장한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경기병들은 '후사르(Huszar)'라는 이름으로 그 명성이 유럽 전체에 널리 퍼졌다고 해요. 

 헝가리 경기병의 명성을 잘 알고 있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은 각국에 흩어져 있던 120명의 헝가리 경기병을 모아 근위대를 구성하여 그녀를 항상 호위하도록 했다고 해요.  













 헝가리는 이슈트반 1세가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 약 500여년간 카톨릭 국가였는데, 1510년 종교개혁 운동이 헝가리에도 미쳐 신흥 귀족들을 중심으로 신교로 개종하는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1526년 모하치에서의 패전으로 헝가리는 세 나라로 분할되었는데, 그 중 오스만 제국의 영향하에 있던 트란실바니아 공국에서는 신교가 널리 퍼져서 30년 전쟁에서 신교국의 일원으로 참석하기도 했어요. 

 합스부르크 왕가에 의해 헝가리가 재통일된 이후에는 카톨릭 세력이 강력해 졌으며, 합스부르크 왕가는 카톨릭 교인이 아닌 경우에는  주요 공직을 맡지 못하게 하는 법안을 마련하는 등 신교도 차별 정책을 펼쳤으며, 헝가리에서는 19세기 중반 독립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카톨릭 국가로 계속해서 발전을 해왔어요.  










 <헝가리 왕실의 보물> 특별전 관람을 마치고 나서 전시관 입구에 마련된 포토존에서 우리딸 사진을 한장 찍어봤어요.





 <헝가리 왕실의 보물> 특별전을 보구 나서 「왕실의 회화」전시실로 가는 복도 한쪽 벽면에 헝가리의 아름다운 풍경을 찍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어요.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페스트(Budapest)는 동유럽의 파리라고 불리는 곳으로, 시내를 관통하는 도나우 강을 중심으로 서편의 '부더(Buda)'와 동편의 '페슈트(Pest)'가 합쳐져 오늘날의 부다페스트가 되었는데, 그 중에서 부더 지역은 왕궁과 더불어 역사적 유물들과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이 많이 산재해 있고, 페슈트 지역은 중세 이래 상업과 예술의 도시로 발전해 왔다고 해요. 





 Herend 제작소는 1826년에 중부유럽의 Herend라는 작은 마을에 설립된 곳으로 초창기에는 질그릇을 주로 생산하고 도자기 개발 연구를 하던 곳인데, 1839년에 Herend 제작소의 소유주가 Mor Pischer로 바뀌면서 도자기 생산에 박차를 가했고, 1851년 런던의 한 박람회에서 수상한 후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정 납품업체로 선정되었다고 해요. 





 아래 사진에 보이는 것은 빅토리아 여왕이 1851년 런던의 박람회에서 처음 보고 그 자리에서 구매했던 데코레이션인데, 이로 인해 Herend는 하루 아침에 유명해지게 되었으며, 이 데코레이션은 여전히 영국에서 가장 많이 찾는 패턴이며, 여러 상류층 가정의 테이블을 장식하고 있다고 해요. 




 국립고궁박물관 지하 1층에서 열리는 <헝가리 왕실의 보물> 특별전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헝가리 왕실과 귀족들의 유물을 통해서 그들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보기 드문 기회인 것 같아요. <헝가리 왕실의 보물> 특별전은 3월 9일까지 열린다고 하니까 시간이 되신다면 주말에 아이들과 함께 경복궁도 둘러보고 국립고궁박물관도 차근차근 둘러본 뒤에 <헝가리 왕실의 보물> 특별전도 둘러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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