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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

[서울 가볼만한곳]서울역사박물관 - 개항, 대한제국기의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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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두번째 포스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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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 조선시대의 서울


 19세기 중후반부터 서울에는 변화의 새 바람이 불기 시작했는데, 1865년 정부는 임진왜란 때 불탄 뒤 방치되어 있던 경복궁을 다시 짓기로 결정하였으며, 제국주의 열강들은 우리나라를 넘보기 시작했어요. 이후 서울은 자주적 개혁을 위한 노력과 식민지화를 위한 압력이 엇갈리고 한국적 전통과 서구적 근대가 공존하는 가운데, 1897년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경운궁을 황궁으로 만들었으며, 그 정면에는 동양적 제국의 상징인 환구단을 건립했어요.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 이후 외세는 조선사회에 끊임없이 개방을 요구했으며, 정부는 반대세력을 억누르면서 미국, 러시아, 영국 등의 열강과 통상 관계를 확대하고, 1880년대 중반부터는 서울에 외국인 거류지도 생겨나게 되었어요. 이에 따라 서울은 점차 이국적 요소와 전통적 요소가 공존하게 되었어요.  





 정부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 초기의 도시 원형을 회복함으로써 왕권의 위엄을 세우고자 했는데, 이를 위해 1865년부터 7년에 걸쳐 경복궁 중건이 이루어졌으며, 동시에 서울의 4대문을 연결하는 성벽이 허물어진 곳을 정비하고 동대문인 흥인지문도 보수하였어요. 

 1882년 조선과 청국 사이에 통상조약이 체결되어 청국 상인들은 서울과 양화진에서 자유롭게 거주하며 장사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었는데, 이 권리는 1885년 영국과 맺은 통상조약을 계기로 다른 나라 상인들에게도 허용되었어요. 1885년 조선 정부는 각국 공사와 협의하여 서울에 외국인 거류지를 지정하였는데, 이에 따라 일본인들은 남산 북쪽 기슭, 청국인들은 청계천 수표교 주변, 그리고 서양인들은 정동 주변에 모여 살게 되었어요. 

 정부는 1880년 일본에 시찰단을, 1881년 청국에 유학생단을 파견하였고, 이듬해에는 미국에 외교사절단을 보내 세계의 실정을 확인하도록 했는데, 이후 정부는 신문물 도입을 위한 개혁을 서둘렀으며, 정부조직을 개편하는 한편, 별기군, 육영공원, 박문국, 제중원, 전환국, 잠상공사, 전운국, 우정국 등 군사, 교육, 출판, 의료, 산업, 통신 등 각 분야에 신식 정부기구와 제조장을 신설했어요. 





 1897년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연호를 광무로 정하였으며, 경운궁을 황궁으로 정하였어요.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면서 동양적인 제국의 상징과 더불어 만국공법적인 국가의 상징을 함께 채택하였어요. 전통적인 상징으로는 황제의 지위로 격상한 의례를 채택하여 환구단에서 천제를 지내면서 황제의 복식인 12장복을 갖추고 입고 경운궁에는 중화전 답도와 천장에 황제를 뜻하는 용을 부조하여 넣었어요. 또한 서구적인 제도도 도입하였는데, 1882년에 제정한 태극기는 전통적 상징인 태극을 근대적 제도인 국기에 도입한 예이며, 우표나 주화, 훈장, 건축물 등에는 태극뿐만 아니라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이나 황제를 상징하는 매 등의 문양을 넣기도 했어요. 





 1896년 고종은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공사관 바로 옆에 방치되어 있던 경운궁을 수리하여  이어할 준비를 시작했는데, 명성황후 빈전과 선원전을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옮기고 새로운 전각들을 신축하여 궁궐의 모습을 갖추도록 했는데, 궐내에는 석조전, 돈덕전, 정관헌 등 양관을 건축하여 고종의 구본신참의 의지를 표현하기도 했어요. 

 대한제국은 구본신참의 원칙 속에서 황제가 주도하는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였는데, 원수부를 중심으로 중앙군과 지방군을 정예화하였고 현대적인 군사교육을 실시하는 무관학교도 세웠으며, 내장원을 중심으로 부국강병책도 세웠어요. 또한 토지제도를 정비하고 광산을 개발하여 자본을 축적하고자 하였으며, 철도 건설과 신교육 도입에도 적극적으로 나섰어요. 








 1883년 미국공사관이 설치된 것을 시작으로 정동 지역에는 서양 각국의 공사관이 건립되었으며, 공사관 주변으로는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 선교사와 의사의 주택들이 들어섰고, 이들은 다시 정동교회와 러시아정교회, 성공회성당 등의 종교시설 및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등의 학교도 세우기 시작했어요. 

 외국 공관들이 들어서자 정동은 외국인 거리가 되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외교관, 선교사, 의사 등이었으며, 그 외에도 대한제국의 근대화에 일조를 한 많은 인물들이 정동에 거주하게 되었어요. 





 손탁은 알자스로렌 출신으로 1885년 초대 주한 러시아공사 베베르를 따라 내한하여 25년간 한국에서 생활하였는데, 궁내부에서 외국인 접대업무를 맡았으며, 1895년 서울 정동에 한옥 한 채를 하사받게 되었어요. 이를 기반으로 1898년 서양식 건물인 손탁빈관을 지었으며,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1902년에 이를 다시 2층으로 지어 정부 직영 영빈관 격인 손탁호텔을 운영하도록 했는데, 손탁호텔은 서양요리와 호텔식 커피숍 경영의 효시가 되었어요. 





 아래 사진들은 개화기 서양문물과 개화기 당시의 사진들의 모습이에요. 








 1896년 종로와 남대문로 주변에 있었언 가옥들을 철거하여 도로를 개선하고, 1897년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하자 경운궁을 중심으로 한 도시개조사업이 이루어졌는데, 환구단과 연결하는 소공로가 신설되었으며, 명성황후 장례식을 기점으로 경운궁과 육조거리를 연결하는 황토현길과 신교가 신축되었어요. 또한 대한제국의 기념물들이 건설되었는데, 1897년 서대문 밖 영은문이 있던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관이 건설되었으며, 경희궁 옆에는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협률사도 들어서게 되었어요. 





 서울역사박물관 제2 전시실은 개화기를 맞이하여 전통과 근대가 공존하게 된 서울의 모습을 유물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고종은 근대화의 요구에 맞추어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하였으며,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했음을 알 수 있어요. 

 서울역사박물관의 더 많은 전시물들은 다음번 포스팅에 전해드리도록 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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