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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

[서울 가볼만한곳]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두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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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두번째 포스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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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첫번째 이야기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제2 상설전시실은 「대한민국의 기초 확립」이라는 주제로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수립부터 1950년의 6·25 전쟁과 전후 근대 국가의 토대를 구축하는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제2차 세계대전 후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대립하는 냉전체제가 형성되어 한민족의 독립국가 건설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미국, 소련, 영국은 한국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최고 5년간의 신탁통치 후 독립정부를 세운다고 합의하였지만, 이 합의는 좌우대립과 미국·소련의 대립 때문에 실행될 수 없었으며 결국은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최종 결정되었어요. 





 1950년 당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을 나타내는 냉전지도인데, 남북한이 38선을 경계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나뉘어진 것을 알 수 있어요. 





 유엔 결의에 따라 1948년 5월 10일에 총선거가 치러지기로 되어 있었는데, 좌익의 총선거 저지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총선거를 거쳐 민주국가의 주권자가 되었어요. 





 5·10 총선거로 구성된 초대 국회는 가장 먼저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 공포하였는데, 헌법에서는 대한민국이 3·1 운동과 상하이 임시정부의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건설된 나라로서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 공화국임을 밝혔고, 대통령제에 내각 책임제를 가미한 정부 형태를 선택하고 사유재산권을 인정하고 시장 경제를 지향함을 밝혔으며, 초등 교육을 의무교육으로 규정하였어요. 





 대한민국 초대 국회는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을 선출하였고, 초대 내각은 임시정부의 주요 인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로 구성되어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음을 보여주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하였어요. 





 아래 사진은 대한민국 건국 국채인데,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계속되는 재정수지 적자를 보전하기 위해 발행한 것이에요. 





 대한민국 제헌국회는 대한민국의 국기를 태극기로, 국가를 애국가로, 그리고 국화는 무궁화로 정했으며, 대한민국 국새도 제작하였어요. 





 남북한에 각기 정부가 수립된 후 소련과 미국은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하였으나 북한은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대규모로 무기와 병력을 지원받았으며, 1950년 6월 25일 기습 남침을 개시하였어요. 





 6·25 전쟁 당시 한국을 지원한 63개 유엔 회원국들이며, 이 중에서 미국, 영국을 비롯한 16개국은 한국전쟁에 직접 참전을 해준 나라들이에요. 





 6·25 전쟁에 대비를 하지 못하고 있던 대한민국은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한달여 만에 낙동강 전선까지 밀리는 등 열세를 보였어요. 하지만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면서 승기를 잡고 압록강까지 북상하였어요. 그러나 대규모로 참전한 중국군에 밀려 후퇴할 수밖에 없었으며, 전투는 북위 38도선과 비슷한 전선을 경계로 하여 교착상태에 빠졌고, 3년여에 걸친 전쟁은 1953년 7월에 휴전에 이르렀어요. 





 6·25 전쟁으로 인해 주택과 산업시설, 학교, 철도, 교량 등 기반시설이 파괴되어으며, 사망자와 부상자의 수도 남한인구의 8%에 해당하는 160만 명에 달했어요. 또한 전쟁 중의 학살과 보복은 남북한 간의 증오와 불신의 골을 깊게 만들어서 전후 남한 사회에는 반공주의가 확고해졌어요. 





 전쟁으로 인한 물적 피해는 1953년 국민소득의 1.7배나 되었지만 한국인들은 정신력을 바탕으로 전후 복구와 재건에 나섰으며, 미국은 27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하여 한국의 재건을 도왔어요. 






 콩나물 교실은 전후 학생들이 콩나물 시루처럼 따닥따닥 붙어서 공부를 할 수밖에 없던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클레이 애니메이션이에요. 





 대한민국은 출범 당시부터 초등학교 의무교육제를 채택하였는데, 의무교육제는 6·25 전쟁 때문에 실시되지 못하다가 1954년부터 6개년 계획으로 추진되었고, 교육시설이 부족함에도 1950년대 말에 초등학교 취학률이 96%에 달하였으며, 1950년대 말에는 문맹률이 20%대로 떨어졌어요. 의무교육제를 통한 인적자원 개발은 1960년대 이후 근대화와 경제성장의 토대가 되었어요. 





 6·25 전쟁 후 한국은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어 긴급한 안보문제를 해결했는데, 이 조약으로 미군 2개 사단이 서울과 휴전선 사이에 배치되어 북한의 재남침을 억제하였어요. 또한 휴전 당시 55만명이었던 한국군은 72만명 수준으로 증강되었고, 장교 교육과 훈련 프로그램도 강화되었어요. 







 6·25 전쟁 후의 대중문화는 전쟁의 비극과 이산의 아픔을 표현하거나 참담한 생활 속의 절망과 자조를 주제로 한 것이 많았으며, 극장에서는 서부 영화와 같은 수입된 미국 영화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이후에는 국산 영화도 점차 인기를 끌었어요. 





 대한민국 정부는 경제부흥을 위해 유상몰수, 유상분배 방식의 농지개혁으로 지주의 토지를 소작농에게 분배하여 자작농이 대거 창출되도록 했으며, 원조 의존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이 수립되었어요. 또한 철도, 도로, 통신, 항만, 발전소 등의 경제 기반시설을 복구, 확충하였으며, 전력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발전소를 복구, 증설하였어요. 





 시발 자동차는 1955년 8월에 생산하기 시작한 첫 국산차로, 전쟁 후 파괴된 자동차의 부품을 활용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요. 





 초대 대통령에 대해서 연임 제한을 없앤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 야당 당수인 조봉암을 사형에 처한 진보당 사건, 경향신문 폐간 등과 같은 이승만의 독재정치로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기에 처하고 국민의 불만이 쌓여가던 중 1960년의 3·15 부정선거에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마산에서 부정선거 항의시위가 일어난 데 이어 4월 19일에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게 되었어요. 이와 같이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계속되자 결국 이승만은 사임하였고, 4·19 혁명은 한국 민주화의 초석이 되었어요. 





 4·19 혁명 후 내각책임제 개헌이 이루어져서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줄이고, 국무총리가 국무위원을 임명하도록 하여 실권을 갖도록 했어요. 그후 민주당 정부의 제2공화국에서 국민의 기본권과 자유가 크게 신장되었으나 그동안 억눌렸던 욕구가 한꺼번에 분출되어 사회는 극도로 혼란한 상태에 빠지게 되자, 군의 일부 장교들이 군 수뇌부의 퇴진을 요구하다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합헌 정부를 무너뜨렸어요.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제2 상설전시실은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6·25 전쟁, 그리고 전후 복구과정과 근대국가의 토대를 구축해 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는데, 이 시기는 대한민국 역사의 격동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사건들이 줄을 이었으며, 이러한 어려운 시기를 이겨냈기 때문에 이후 대한민국이 근대국가로 발전해갈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1960년대 이후 대한민국의 성장과 발전에 대해서는 다음번 포스팅에서 전해드리도록 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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