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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

[서울 가볼만한곳]서울역사박물관 - 조선시대의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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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역사박물관은 조선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곳으로 4곳의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 기증유물전시실, 교육실, 강당, 뮤지엄샵이 있으며,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과 문화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는 곳이에요. 





 서울역사박물관 제 1관은 「조선시대의 서울 : 500년 왕도를 세우다」라는 주제로, 조선 건국 후 한양 정도부터 개항 이전까지 조선시대의 서울을 보여주는 공간으로서, 한양의 육조거리와 시전을 중심으로 북촌, 중촌, 남촌, 그리고 성저십리에 걸쳐 다양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어요. 





 조선 건국 후 한양으로 천도하기까지의 사건들을 날짜별로 정리해 놓은 것이에요. 





 『조선팔도고금총람도는 각 지역에 대하여 중요한 유적과 인물 등을 기록한 인문지리지도로 보물 제 1602호로 지정된 것이에요. 





 태조는 새로운 왕조를 세운 이후 곧바로 수도를 한양으로 이전하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가 심했고, 천도 지역도 쉽게 정해지지 않았으며, 장단의 불일사와 도라산, 적성의 선점이나 광실원 등 다양한 수도 후보지가 제기되었어요. 하지만 결국 태조는 정도전등 여러 신하들과 무학대사의 의견을 수렴하여 한양을 도읍지로 정했어요. 







 경국대전은 1603년에 만들어진 조선의 기본 법전으로, 한성부는 서울의 인구, 토지, 도로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고 규정해 놓았어요. 





 1394년 한양이 새로운 도읍지로 정해진 후 새 수도는 우리의 옛 전통과 풍수지리, 그리고 유교적 이념을 겸비하여 건설되었어요. 먼저 우리의 성곽 전통에 따라 산세에 의지하여 도성을 건립하고, 그 안에는 『주례』에 나오는 '좌조우사'의 이념에 맞추어 궁궐과 함께 종묘와 사직을 배치하였어요. 

 태조는 한양에 궁궐과 함께 종묘와 사직 체제를 완성하였고, 도성도 완공하였는데, 왕자의 난으로 즉위한 정종은 한양이 불길하다며 개성으로 돌아갔어요. 하지만 태종은 다시 한양으로 천도를 결정하고 창덕궁을 새로이 건설하였으며, 이후 세종 대에 도성을 보수하고, 도심지역의 도로를 정비하면서 한양은 조선의 수도로서의 위용을 과시하게 되었어요. 

  한양은 북쪽의 백악산을 중심으로 동서로 뻗은 인왕산과 타락산이 북쪽을 감싸 안고, 남쪽에는 목멱산이 버티고 있는 분지지형 안에 자리하고 있으며, 산에서 내려온 물은 평탄한 중앙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청계천에 모였다가 중랑천과 만나 한강으로 흘러드는 모습이었어요. 이러한 지형조건으로 한양의 동맥인 도로망은 동서방향으로 발달하였고, 궁궐과 관청 및 고급주택가들은 양지바른 북측에 들어서게 되었어요. 





 왼쪽의 초상화는 영조 어진으로 복제품이며, 진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어요. 중앙의 병풍은 1765년 영조의 보령 72세와 재위 41년을 기념하여 경희궁 경현당에서 열린 수작연과 기로소 영수각에서 열린 기로연을 그린 궁중행사도로 보물 제 1531호로 지정된 것이에요. 오른쪽의 수선전도는 서울의 행정구역, 관청, 교량 등을 자세하게 그려 목판으로 인쇄한 후에 산과 하천, 주요 궁궐등을 엷게 채색한 것이에요. 






 1592년에 발생한 임진왜란으로 궁궐과 관청을 비롯한 대부분의 도시 시설물들이 훼손되었는데, 1598년 전쟁이 끝난 이후 점차 재정비가 이루어졌는데, 본격적인 복구 작업은 광해군 때에 진행되었어요. 광해군 즉위년인 1608년에 종묘와 인정전을 비롯한 창덕궁의 주요 전각을 준공하였고, 1609년에는 창덕궁의 나머지 전각들을 완공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사직을 복구하였어요. 이후 1612년에는 10여 개소의 관청을 복구하여 정상적인 업무가 가능해지고, 이후 시전 등을 재건하면서 한양 도성은 차츰 본래의 모습을 찾게 되었어요. 

 또한 임진왜란 이후 수도방위체제를 강화하여, 인조 때에는 친위군 및 경기도 방위 군대를 각각 어영청과 총융청으로 재편하고 수어청을 설치하였으며, 숙종 때에는 금위영을 설치하면서 기존의 훈련도감과 함께 오군영체제를 확립하였어요. 정조 때에는 광주, 수원에 군사행정도시인 유수부를 설치하여 기존의 개성, 강화와 함께 4유수부를 갖추어 수도 한양을 중심으로 내·외곽의 방위체제를 정비하였어요. 







 조선시대에는 세금을 부과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구를 파악했기 때문에 인구통계에 누락이 많았으며, 따라서 학자들은 전체 인구의 30~40%가 통계에서 빠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정조 때에 발간된 『호구총수』에서는 한양의 인구가 189,153명으로 집계되었는데, 도심인 중부가 약 2만 명에 불과하였던 서부는 6만 8천명, 남부는 4만 6천명으로 한강을 끼고 있는 지역의 인구가 상대적으로 많았다고 해요. 






 북촌은 뒤로는 백악에서 응봉으로 흘러가는 산자락을 기대고 앞으로는 청계천을 바라보며, 아울러 동쪽에 위치한 창덕궁과 서쪽에 자리한 경복궁의 두 궁궐을 품고 있는 곳으로, 대개 고위 관직에 있으며 재산과 학문적 소양을 두루 갖춘 사람들이 모여 산 이곳은 서울 양반들의 중심 터전이 되었어요. 

 한양에서 대대로 부귀를 누리며 살던 이들을 경화사족이라고 하는데, 특히 북촌에 많았으며, 북촌의 사족들은 보수 세력으로서 당색은 대개 서인 노론계에 해당되었어요. 이들은 성리학적 질서를 추구하고 대의명분을 중시하면서 명나라를 정통 왕조로 인정하는 세력이었는데, 18세기 중반이 되자 경화사족들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어요. 





 지리적으로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는 북촌은 조선초기부터 권력 있는 사대부들의 주거지로 자리매김했으며, 북촌에는 이들의 저택이 즐비했다고 해요. 





 북촌의 경향방(현재의 낙원동)에는 해주오씨 오태주와 그 후손들이 살았는데, 오태주는 형조판서를 지낸 오두인의 아들로 1680년에 현종의 셋째 딸인 명안공주와 혼인하여 이곳에 살았으며,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명문가의 위상을 이어가며 북촌의 역사를 지켜왔다고 해요. 





 아래 두 장의 사진들은 북촌에서 당시에 사용되던 물건들을 전시해 놓은 것으로 당시 북촌 사대부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어요.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궁궐은 모두 소실되었으며, 광해군 때에 이르러 창덕궁을 재건하고, 그 이후에 경희궁을 건설하여 창덕궁은 법궁, 경희궁은 이궁으로 부르며 새로운 양궐 체제가 성립되었어요. 고종 때 경복궁이 중건되고, 이후 고종이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에 살게 되면서 조선의 궁궐은 기존의 창경궁과 함께 5개의 궁궐이 되었으며, 도성 내의 여러 곳에 궁궐을 건설하였던 점은 조선이 가진 궁궐 문화의 특징이었어요. 







 종묘와 사직, 즉 종사는 국가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였는데, 종묘는 왕실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이며, 사직은 토지의 신인 국사지신과 곡식의 신인 국직지신에 제사지내는 곳으로 국가의 안녕과 풍요를 비는 곳이에요. 조선왕조는 좌조우사의 원칙과 음양의 이치에 따라 1395년에 궁궐을 기준으로 동편에 남쪽을 향한 종묘를, 서편에 북쪽을 향한 사직을 완성하였어요. 

 수도 한양은 정치·경제의 중심지인 동시에 교육의 도시이기도 했는데, 유학을 최고 이념으로 삼은 조선왕조는 최고 학부인 성균관을 두어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했어요. 1398년 숭교방(현재의 명륜동)에 건립한 성균관은 명륜당에서는 생원과 진사들을 교육하고, 문묘에서는 공자를 비롯한 5성과 10철, 우리나라 18현 등의 위패를 모셔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이용되었어요. 





 육조거리는 광화문 앞의 대로를 이르는 명칭으로 의정부나 육조와 같은 국가의 중추적인 관청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이곳은 경복궁과 함께 왕이 사는 도시의 상징이었으며 왕과 백성이 만나는 소통의 거리이기도 했어요. 






 한성부의 수장은 한성부판윤으로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장에 해당하는데, 판윤은 정2품의 중앙관직으로 6조의 판서와 같은 품계였으며, 그 아래에는 제1·2 부시장에 해당하는 좌윤과 우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서윤과 판관 각각 1명, 주부 2명을 두었는데, 서윤은 이방, 판관은 호방, 주부 2명은 각각 예방과 병방, 형방과 공방의 일을 맡아서 하였어요. 





 한성부는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청에 해당하는 곳으로 도성의 백성들을 보살피고, 도시시설을 설치, 운영하는 곳이었으며, 한양의 행정 및 사법을 담당하는 기관이었으며, 군사나 치안 업무 등에 대해서는 병조의 삼군문이나 포도청, 형조 등과 분담하였어요. 현재와 비교하면 서울특별시는 행정 기능 중심의 지방자치기구이지만 한성부는 행정, 사법, 치안을 아우르는 동시에 중앙관청의 기능도 가진 복합적인 기관이었어요. 





 시전은 궁궐이나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해주고 이를 대가로 금난전권을 얻어 상품을 독점적으로 판매하였으며, 시전상인들은 허가받은 행랑에서 상업을 하면서 한양의 상품유통구조를 장악하게 되었어요. 이로 인해 여러가지 문제점들이 발생하자 1791년(정조 15)에 신해통공을 발표하여 육의전 이외의 시전이 갖고 있던 금난전권을 회수하였어요. 





 운종가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흩어지는 거리라는 뜻으로, 흥인지문과 돈의문을 가로지르는 동서대로에 있었는데, 운종가의 양쪽으로는 국가에서 지은 장량이 이어져 시전으로 쓰였으며, 운종가의 중심에는 종루가 있었어요. 

 운종가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기에 이야깃거리도 많았는데, 운종가에는 이야기꾼과 재주꾼들이 저마다 솜씨를 뽐냈고, 여리꾼들은 순박한 이들의 쌈짓돈을 노리기도 했어요. 운종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지만 아녀자들이 활보하지는 못했으며, 양반집의 경우에는 노복이나 겸인을 부려 물건을 사들이곤 했어요. 





 상평통보는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공평하게 쓸 수 있는 돈"을 뜻하는데, 숙종 때에 국정화폐로 발행되었으며, 제작시기에 따라 당일전, 당이전, 당백전 등으로 불려요. 








 한양은 내사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이곳에서 내려가는 물은 서에서 동으로 흘러 도성의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으로 나가 중랑천과 합류한 후 한강으로 흘러갔으며, 이 내수를 가리켜 개천이라고 했으며, 이것이 오늘날의 청계천이에요. 

 개천에는 광통교, 수표교 등 많은 다리들이 놓여있어 북촌과 남촌을 이어주었으며, 그밖에도 정월대보름의 다리밟기, 연날리기 등 세시풍속과 놀이의 공간으로도 이용되었어요. 







 중촌은 개천을 중심으로 지금의 청계천과 종로 일대를 말하는데, 이곳에는 주로 역관, 의관, 법률가인 율관 등 전문직 관리나 관청에서 근무하는 서리인 경아전과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살았다고 해요. 

 중인은 양반과 평민의 중간 계층으로 대개 역관, 의관, 경아전, 양반의 첩의 자식인 서얼, 지방관청의 행정실무자인 향리 등이 속하며, 중인은 전문성을 바탕으로 쌓은 지식과 교양으로 예술과 문학 등의 분야에서 당대의 문화를 선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어요. 

 양반 첩의 자식인 서얼은 서얼금고법으로 문무관 진출이 막혀 중인이 할 수 있는 기술관 등으로만 진출할 수 있었는데, 영조 때에는 금고법이 폐지되면서 법적인 차별이 없어졌어요. 하지만 수백년 동안 지속된 관습으로 인한 차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으며, 영조 대부터 서얼을 비롯한 중인들은 집단으로 상소를 올려 꾸준하게 국왕에게 차별철폐를 요청하였어요. 





 남촌은 목멱산의 아래쪽에 위치했던 마을로 지금의 남산동, 회현동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청계천 이남을 말하는데, 한양의 북쪽에 궁궐과 주요 관청들이 있었던 반면, 남쪽에는 일반 관청이나 군영들이 많이 자리하고 있었어요. 

 조선시대 남촌에는 남인을 비롯하여 소론, 소북 등 대체로 권력에서 소외된 가난한 선비들이 살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청렴한 관원과 고고한 선비들이 많이 살았으며, 명문가도 이 일대에 여럿 거주했다고 해요. 








 숭례문은 1395년(태조 4)에 짓기 시작하여 1398년(태조 7)에 완성한 한양 도성의 남쪽 성문이며, 숭례문을 통하여 한양과 조선팔도가 연결되어 있었으며, 숭례문부터 한양의 중심부인 종루까지는 일찍이 대로가 건설되었고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다고 해요. 

 숭례문은 한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출입하는 곳이었는데, 성문이 개방된 시간에는 도성 안팎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인파로 들끓었으며, 인근에는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칠패시장이었어요. 





 조선시대 한성부는 도성 안과 함께 성 바깥 약 10리(약 4km)까지를 관리하였는데, 동쪽으로는 양주 송계현과 대현까지, 서쪽으로는 양화도와 고양 덕수원까지, 남쪽으로는 한강과 노량진까지가 그 범위에 속하며, 조선 전기에는 도성 밖에 많은 사람들이 살지 않았지만 후기가 되면 한양 인구의 약 50%가 거주하게 되었어요. 이러한 도성 밖 성저십리는 조선후기 한양이 왕도에서 상업도시로 변모했음을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할 수 있어요. 






 한양사람들은 다채로운 놀이를 즐겼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남자들의 놀이인 편싸움, 연날리기, 여자들의 놀이인 풀각시놀음, 화전놀이, 그네뛰기 등이 있으며, 놀이는 보통 세시 혹은 절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고 해요. 







 김홍도가 그린 풍속도병인데, 이 그림은 한양의 남산과 성곽, 집과 거리의 모습이 들어 있으며, 선비들을 비롯한 백성들의 모습과 거리, 건물, 각종 기물 등의 모습도 살펴볼 수 있어요. 이 그림은 복제본으로 원본은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해요. 





 조선시대 사람들의 출생부터 혼례, 관직, 제례에 이르기까지의 풍습에 대한 설명과 각각 관련된 유물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어요. 





 조선시대의 서울 한양은 전국의 물산이 모여들었다가 다시 흩어지는 곳이었는데, 한양과 지방을 잇는 간선도로망은 18세기 중엽 6대로에서 18세기 후반 9대로, 19세기 후반 10대로로 증가하게 되었어요. 





 경강은 전국 해로유통권의 중심이면서 전국 최대 시장인 한양의 관문이었으며, 경강지역 중에서도 마포는 상품유통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어요. 

 18세기 후반 여객주인업, 선운업, 선상업은 권력 가문과 결탁한 대상인들이 차지하였는데, 특히 경강상인들은 2천 석을 싣는 경강대선을 앞세워 전국의 상품유통망을 장악하였으며, 신속한 수송능력과 정보를 기초로 지역간 가격 차이와 독점 상업행위인 도고를 통해 상당한 이익을 얻었어요. 





 서울역사박물관은 600년 이상 우리나라의 수도 역할을 담당해온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지난 2002년에 개관한 곳으로, 특히 학생들에게는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보다 심도있게 이해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어요. 

 서울역사박물관은 단순히 유물의 전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체험 및 교육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으니까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http://www.museum.seoul.kr)에서 자세한 사항을 확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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