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서울

[서울 가볼만한곳]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세번째 이야기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서울 가볼만한곳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세번째 포스팅이에요.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이전 포스팅을 보시려면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세요.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첫번째 이야기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두번째 이야기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제3 상설전시실은 「대한민국의 성장과 발전」이라는 주제로,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던 1960~1980년대 중반까지의 모습을 살펴보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생활 모습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1961년에 군사 정부는 경제 개발에 착수하여 경제기획원을 설립하고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하였는데, 정부는 수출 지향 공업화 전략을 고안하여 수출 진흥을 위해 저리의 수출 금융을 제공하고 수출 산업단지를 조성하는 등 수출 기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어요. 또한 정부는 중화학 공업 육성 계획을 세우고 한일 국교 정상화와 베트남 파병으로 얻은 외화와 외국 차관을 중화학 공업 육성에 투자했어요.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얻기 위해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을 서둘렀는데, 야당과 대학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억누르고 1965년에 회담을 마무리했어요. 

 




 정부는 과학기술 진흥정책을 세우고 이를 추진할 과학기술처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설립하였으며, 과학기술에 대한 집중 투자에 힘입어 전기·전자·자동차·제철·기계·조선 산업 등이 발전할 수 있었어요.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총 8,000여 명의 광부와 11,000여 명의 간호사가 서독으로 파견되었는데, 이들은 받은 월급 대부분을 고국의 가족들에게 송금하였으며, 그 총 금액은 1억 달러가 넘었다고 해요. 





 당시 독일에 파견되었던 광부들과 간호사들의 사진과 그들이 남긴 말들을 함께 전시해 놓았어요. 







 중동에 건설 붐이 불면서 많은 건설 노동자들이 중동에서 외화벌이를 하기도 했어요. 





 베트남전이 확대되어 미국과 베트남 정부가 파병을 요청하자 박정희 정부는 1973년까지 8년간 연인원 31만여 명을 파병하였으며, 10억 달러가 넘는 외화 수입을 얻기도 했지만 5,000여 명의 전사자와 수많은 부상자, 그리고 고엽제 후유증 환자 등 큰 희생도 따랐어요. 





 1960년대 말 북한의 군사 도발이 증가하였으나 닉슨독트린에 따라 주한미군 일부가 철수하고, 미국·중국의 국교 정상화 합의 등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급변하자, 정부는 자주 국방 태세를 강화하였으며, 무기의 국산화에 착수하였어요. 





 휴전 후 남북 관계는 대립과 화해가 얽히며 펼쳐져 왔는데, 7·4 남북 공동 성명을 시초로 하여 남북 적십자 회담이나 정부 고위급 회담 및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정상 회담을 통한 공동 성명과 합의서 발표, 남북한 UN 동시 가입, 이산가족 상봉 등 남북 화해의 노력도 펼쳐졌어요. 





 1960년부터 2000년까지 한국은 세계 최고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였는데, 이러한 경제성장은 적절한 경제개발 전략을 선택하여 강력히 추진한 정부, 뛰어난 기업가 정신을 보인 기업인들, 그리고 열악한 환경 하에서도 열심히 일한 국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여요.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에 공사가 시작되어 1970년 7월에 완공되었으며, 경부고속도로의 건설로 15시간의 이동 시간이 5시간으로 단축되어 전국이 일일생활권으로 바뀌게 되었어요. 






 아래 사진은 대한민국 1호 전자제품들을 모아놓은 것이에요. 





 1960년대에 정부는 철강재를 자급하기 위해 종합 제철소 건설을 추진하였는데, 처음에는 자금 조달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한일 국교정상화에 따른 대일 청구권 자금을 전용하고 일본 제철업계의 기술 협조를 받아 1970년 포항에 종합 제철소 건설공사를 지삭하여 3년여 만에 준공하였어요. 이후 한국의 철강 산업은 지속적인 투자와 연구개발로 세계 수준의 경쟁력을 갖추었고, 건설, 조선, 자동차, 전자 산업의 발달에 큰 역할을 담당해 왔어요.





 대한민국 1호 고유모델 자동차인 현대 포니1이에요.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자동차들을 연대순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에요. 






 대한민국 경제 성장을 그래프를 통해 볼 수 있는데, 1960년대 이후 급속하게 성장해 온 것을 알 수 있어요. 





 1960년대 이후 경제 개발에 따라 농촌 인구의 유입으로 도시 인구가 급팽창하였는데, 정부는 도시의 주택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파트형 공동 주택을 건설하도록 장려하여 아파트가 주된 주거 형태가 되었고, 교통난을 해소하기 위해 버스를 증차하고 지하철을 건설하기 시작했어요. 





 서울의 인구는 1963년에 325만 명이었으나 이후 급속하게 증가하여 1970년 543만 명을 거쳐 1988년에는 1천만 명을 넘어서게 되었어요. 





 1960년대 말부터 전차를 대신하여 시내버스가 '서울 시민의 발'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1974년 8월 15일 처음으로 서울역과 청량리 구간에 지하철이 개통된 후 여러 노선의 지하철이 속속 개통되었으며, 1985년 부산 지하철 개통을 필두로, 대구, 인천, 광주, 대전에도 지하철이 건설되었어요. 





 급속한 성장의 이면에는 그늘도 깊었는데, 농업과 공업 간, 도시와 농촌 간, 지역간 격차가 커졌으며, 수출 산업의 경쟁력 확보에 주력하다 보니 근로자들의 권익은 무시되었어요. 





 1970년 경부터 낙후된 농촌을 살리기 위해 새마을운동이 추진되었는데, 새마을운동은 농가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으로 출발하였으나 이후 농촌을 넘어서 도시 지역과 직장, 공장, 학교 등으로 확산되어서 우리나라의 급속한 경제성장에 일조를 담당하게 되었어요. 






 경제 성장과 함께 대중문화도 발달하였는데, 소득 향상에 따라 텔레비전이 급격히 보급되었고, 1980년에 시작된 컬러텔레비전 방송은 더 많은 사람들을 텔레비전 앞으로 끌어들였어요. 영화는 1960년대에 황금기를 구가하였으나 1970년대에는 텔레비전의 보급과 정부의 통제 강화 등의 영향으로 쇠퇴하기 시작했어요. 








 1970년대 젊은이들의 문화를 상징하는 통기타와 청바지의 모습이에요. 





 예전에는 음악다방이라고 해서 다방에서 DJ들이 신청곡을 틀어주곤 하였는데, 요즘은 보기 힘든 광경이에요. 





 1961년의 5·16 군사정변 이후 1987년 직선제 개헌까지는 몇 년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군사 정부가 통치를 하였는데, 야당 정치인들과 학생, 재야 지식인, 일반 시민들은 3선 개헌 반대투쟁과 유신헌법 개정운동, 5·18 광주 민주화운동, 직선제 개헌 운동 등의 민주화 운동 등을 펼쳤으며, 전두환 정부가 1987년 6월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고 헌법을 개정함으로써 민주화를 위한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어요.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제3 상설전시관 끝에는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들의 초상화와 그들의 사진이 함께 전시되어 있어요.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제3 상설전시관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이러한 경제성장은 정부나 기업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쉬지않고 일을 해온 노동자들에게 그 원동력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 같아요.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 관한 더 많은 내용은 다음번 포스팅에 전해드리도록 할께요. 





여러분의 댓글이 제 블로그를 더 풍성하게 만들어 준답니다

이 포스팅에 만족하신다면 아래의 손가락버튼도 꾸욱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