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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

[서울 가볼만한곳]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첫번째 이야기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서울 가볼만한곳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은 개항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대한민국의 역사를 이해하고 미래의 대한민국의 모습을 그려보는 장소로,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은 경제기획원, 문화체육관광부 등 정부의 주요 청사로 사용되었던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지난 2012년에 개관한 곳이에요.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관람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에요.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 가시려면 5호선 광화문역 2번 출구로 나와서 약 3분 정도만 걸어오시면 되요.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은 4개의 상설전시실과 2개의 기획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에서 3층에 있는 제1상설전시실을 먼저 둘러보기로 했어요. 





  제1상설전시실은 「대한민국의 태동」이라는 주제로 1876년 개항 이후부터 1945년 일제로부터 독립할 때까지의 역사적 사실과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어요. 





 1870년대 개항 이후부터 1940년대 광복의 그날까지 10년 단위로 주요한 사건들 위주로 보여주고 있어요. 





 19세기에 조선 연해에 서양의 이양선들이 자주 출몰하며 통상을 요구했지만 조선정부는 이를 거부하였고, 이후 프랑스와 미국은 자국 선교사의 순교나 선원의 피살을 구실삼아 문호 개방을 요구하며 강화도에 침입하였는데,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에 나선 이후 일본이 무력을 앞세워 개항을 요구하자 국내에서도 개항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져서 조선은 결국 개항을 하게 되었어요. 





 일성록(日星錄)은 면암 최익션의 문집으로 개항을 반대했던 위정척사파의 사상을 잘 알 수 있는 책이에요. 





 조선은 일본과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개항을 하게 되는데, 이 조약은 조선정부가 일본인 치외법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한 불평등 조약이었으며, 이후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과도 비슷한 형태의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 서울 정동 일대에는 러시아, 영국, 미국 등의 영사관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어요. 





 개항 이후 조선은 서구 문물을 수용하는 개화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외국의 문물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수신사를 파견하고, 정부 기구를 개편하였으며, 신식 군대를 창설하였어요. 한편 급진 개화파가 주도한 1884년의 갑신정변은 실패로 끝났지만 개화정책은 계속되었고, 이는 재정일원화, 도량형 통일, 신분제 폐지 등을 골자로 하는 갑오개혁으로 이어졌어요. 





 문호 개방 이후 새로운 생활문화가 들어와서 신식학교에서 근대 학문을 가르쳤으며, 서양식 건축과 전기, 전화와 전신, 교통시설, 우편제도, 금융제도 등이 도입되었어요. 







 태극기는 박영효가 1882년에 일본에 수신사로 갈 때 처음으로 사용한 것으로, 고종은 1883년에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 공포하였어요. 

 태극기의 흰색은 밝음과 순수, 평화를 사랑하는 한국인의 민족성을 나타내고, 태극문양은 음과 양의 조화를, 모서리의 4괘는 하늘, 땅, 물, 불을 나타내어, 태극을 중심으로 통일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에요. 

 왼쪽에 있는 커다란 태극기는 구한말 조선의 외교 고문을 지낸 미국인 데니에게 고종이 하사한 데니 태극기이고, 오른쪽 위에 있는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가 1941년에 중국에서 미국으로 가던 벨기에 출신의 한 신부에게 준 태극기이며, 오른쪽 아래에 있는 것은 한국 광복군의 서명이 들어있는 태극기에요.





태극기는 그 시대에 따라서 약간씩 변화되어 왔으며, 문화재청에 의해서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요.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이 돌아와 정부의 지원을 받아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는데, 정부 고관들과 지식인들은 외세에 대한 의존을 벗어나자는 취지로 독립문 건립과 독립공원 조성을 창립사업으로 내걸로 독립협회를 창설했어요. 이후 독립협회는 교육 진흥, 산업 개발, 자주 독립 등을 주제로 한 토론회를 개최하여 민중을 계몽했으며, 열강의 이권침탈에 반대하고 국정 개혁을 요구하는데도 앞장섰어요.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고, 친러파 정권이 성립하게 되었어요. 1년 뒤 환궁한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고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하였으며, 황제의 권력을 기반으로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했어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자,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와 함께 일본에 압력을 가해 요동반도를 청에 돌려주도록 하였으며, 이후 조선왕실이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의 간섭을 막으려 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하게 되었어요. 이후 한동안 러시아와 일본이 대치하였으나 영국과 미국의 지지를 받은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차지하게 되었어요. 





 러일전쟁 후 영국, 미국, 러시아 등의 열강으로부터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승인받은 일본은 1905년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을 체결했으며, 고종은 대한제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는 등 구국 외교활동을 펼쳤으나 결국 1910년에 대한제국은 일본에 강제로 합병이 되었어요. 





 대한제국이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기고 내정간섭까지 받게 되자 국권 수호를 위해 힘을 기르자는 계몽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중에서 대한자강회는 교육 진흥과 산업 육성을 통한 국권수호운동을 벌였고, 신민회는 근대학교를 설립하고 산업진흥운동을 벌였으며, 일본에 대한 국가 채무를 상환하려는 국채보상운동도 전개되었어요. 





 일제 강점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 다섯 열사의 포스터인데, 왼쪽 부터 윤봉길, 백정기, 이준, 안중근, 이봉창 의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요. 





 1900년대 초에는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의병들의 봉기가 이어졌는데,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항의하는 을미의병과 을사늑약에 항의하는 을사의병, 그리고 고종 퇴위와 군대 해산에 항의하는 정미의병이 차례로 이어졌는데, 특히 해산한 군인들이 합류하면서 의병 투쟁은 1908년 최고조에 달하였고, 일본군은 1909년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대토벌 작전을 벌이기도 했어요. 





 전국적으로 의병들이 봉기한 지역과 의병장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지도에요.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일제의 탄압과 점점 더 심해졌고, 김구를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에 본거지를 두고 독립운동을 계속해 나갔어요. 





 일제는 한국과 일본이 한 몸이며, 한국인과 일본인의 조상과 뿌리가 같다고 선전하면서, 한국어를 쓰지 못하게 하고, 한국인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며(창씨개명), 천황을 향해 절하고 신사에 참배하도록 강요했어요. 

 




 조선총독부는 일제의 한국 강점과 탄압의 핵심 기관이었는데, 조선총독부는 1912년부터 1918년까지 토지조사사업을 전면적으로 실시하였는데, 이는 식민통치를 위한 재정을 확보하고 일본인들의 토지 매입을 쉽게 하려는 의도였어요. 






 일제는 1938년부터 지원병 및 학병제, 징병제 등으로 젊은 남성들을 병사로 끌고 갔으며, 징용의 방식으로 탄광, 공사장, 공장의 인력을 메우기도 했어요. 또한 젊은 여성들은 '근로정신대'나 '일본군 위안부'로 끌고 갔으며, 이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부지기수였어요. 





 1919년 3월 1일에 민족대표 33인이 낭독한 3·1 독립선언서에요. 





 3·1 운동은 한민족 각계각층이 참여하여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최대 규모의 항일 독립운동으로,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되어 석 달이 넘게 계속되었다고 해요. 

 3·1 운동 후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이 세운 여러 임시정부가 통합하여 1919년 9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어요. 






 3·1 운동 당시 충청남도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고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된 유관순의 수형 기록표인데, 체포될 당시 유관순의 나이는 16세였다고 해요.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이 낭독한 독립선언서로, 민족자결 원칙에 입각하여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인도주의에 기초를 둔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독립 방안을 제시하였어요. 





  3·1 운동 이후 국내 각 분야에서 한국인의 권익을 옹호하고 문화와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민족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는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하나의 목소리였다고 볼 수 있어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 조직과의 연계 활동과 외교활동에 주력하였지만 일제의 탄압과 열강의 외면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나 김구가 지휘한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으로 활기를 되찾게 되었으며,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국민당 정부는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나섰어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 난징, 창사를 거쳐 충칭으로 옮겨가게 되었어요. 





 독립운동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났는데, 중국에서는 서전서숙에 이어 명동학교가 민족교육에 주력하였고, 신흥무관학교는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주력했어요. 미국에서는 구미위원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선전활동을 벌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중국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국내 진공을 준비하였어요. 





 대한민국이 광복된 1945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애쓴 많은 인물들의 사진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에요. 






 일제강점기부터 1945년 광복 직후까지 사용되었던 우체통의 모습인데, 일본식 우편 마크 위에 대한민국 우편 마크를 덧칠하여 사용했다고 해요. 







 광복의 기쁨도 잠시,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분단되는 아픔을 맞이하게 되는데, 아래 사진은 38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나라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어요. 






 광복 후 국내의 민족운동가들은 조직을 만들어 사회 혼란을 막고 새 나라를 건설하는 작업을 시작하였으며, 해외의 독립운동가들도 조국에 돌아와서 새 나라를 세우는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임시정부 수립과 최고 5년 간의 신탁통치를 결정하자 남한에서는 우익이 격렬한 반대를 하였으며, 좌익은 3국 외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며 맞섰어요. 

 남한에 주둔한 미군은 조선총독부 통치기구를 접수하여 직접 남한을 통치하는 군정을 실시하였는데, 미군정은 일제 강점기의 법령을 대부분 유지하는 현상유지정책을 펼쳤어요.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의 대한민국 역사에 대해서는 다음번 포스팅에서 전해드리도록 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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