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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

[서울 가볼만한곳]우리나라 금융발전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한국금융사박물관 두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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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금융사박물관 첫번째 이야기







 우리나라의 근대 금융은 다양한 은행들이 설립되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개항 이후 일본을 비롯한 외국 은행들이 우리나라에서 많은 이익을 취하자 이에 자극받은 국내의 선각자들은 근대적 금융제도 마련을 위해 은행의 설립을 추진하였으며, 1894년 갑오개혁으로 조세의 금납화가 이루어지면서 국고금 수납을 대신해 줄 금융기관이 필요하게 되었어요.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따라 한성은행과 조선은행이 설립되었고, 이후 대한천일은행이 영업을 시작하는 등 정부의 지원과 민족자본이 합쳐진 근대적인 금융기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1876년 개항 이후 외국계 금융기관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그 포문을 연 것은 1878년 일본 제일은행이었으며, 제 18은행과 제 58은행, 홍콩상하이은행, 한·러은행 등이 그 뒤를 이었어요. 이들 외국은행은 일반적인 은행업 외에도 수출입품에 매기던 세금 업무와 은매입, 그리고 차관제공과 국고금 업무 등을 취급하면서 근대적인 금융제도가 마련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많은 이익을 누릴 수 있었어요.





 1890년대 후반에 설립된 조선은행, 한성은행, 대한천일은행 등을 필두로, 한일은행, 중앙은행, 독립제일은행 등의 민족은행들이 1900년대 초까지 설립되었는데, 이후 일본이 식민지 금융체제를 위해 은행 관련법을 정비하면서 이들 은행은 일제의 간섭에 시달리게 되었어요. 





 1894년에 시행된 갑오개혁은 국가제도의 근대적인 변화를 위해 여러가지 조치를 취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조세의 금납화였어요. 조세의 금납화란 갑오개혁 이전에 세금을 현물로 거두어 들이던 것을 운반과 보관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모든 조세를 탁지부에 모이도록 했는데, 중앙은행제도와 화폐금융제도가 제대로 확립되지 않아서 세금징수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해요. 





 우리나라는 외국계 은행으로 인한 경제적인 피해를 막고 조세의 금납화를 담당할 근대적 은행을 필요로 했는데, 이에 따라 한성은행, 조선은행, 대한천일은행 등이 세워졌으며, 이들 민족은행들은 우리나라에 근대적인 금융제도가 정착하는데 있어서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했어요. 





 우리나라 최초의 대출은 한성은행의 '당나귀 대출'이라고 전해지는데, 이는 대구의 한 상인이 경성에 물건을 사러 왔다가 자신이 가진 돈 이상의 물건을 구매하고자 당나귀를 담보로 맡기고 대출을 받아 물건을 구매했다는 일화에서 비롯된 말이에요.  





 근대적인 화폐를 사용하는 외국과의 무역이 많아지면서 우리나라도 점차 근대적인 화폐금융제도의 수립이 필요해졌는데, 이에 따라 1894년 갑오개혁 당시 신식화폐발행장정을 공포·시행하고 은본위제도를 실시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후 1901년 금본위제를 채택한 이후 1903년에는 중앙은행을 설립하려고 했으나 러·일전쟁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결국 자주적인 화폐제도 수립은 실패하고 말았어요.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이후 한국의 재정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은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다는 화폐정리를 실시했는데, 강제적인 화폐정리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상업계가 큰 피해를 받았으며, 서울상인들은 경성상업회의소를 설립하여 조직적으로 대응하기도 했어요. 이에 일본은 한국 자산가들의 반일 감정을 무마하기 위해 농공은행, 지방금융조합, 공동창고 주식회사, 어음교환소와 같은 금융기관들을 설치했어요.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2월, 일본으로부터 진 1,300여 만원의 빚을 국민 모금으로 갚고 경제독립을 이룩하자는 취지에서 전개된 경제주권회복운동으로 남자들은 담배를 끊고, 여자들은 각종 패물을 팔아 모은 돈을 기탁하였으나, 위기감을 느낀 일본의 방해로 결국 종료되고 말았어요.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 경제는 외형에 있어 양적으로 팽창하고 근대화를 이룬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식민지 금융정책과 전시자금조달이라는 역할에 머물렀으며, 중일전쟁 이후에는 은행의 경영악화로 인해 은행들간의 합병이 가속화되었어요.





 1910년대에는 1912년에 제정된 '은행령'과 제1차 세계대전의 특수로 인해 20여 개의 새로운 은행이 생겨났으며 40여 개의 은행이 설립을 신청했으며, 그 이전에 설립되었던 한성은행, 대한천일은행, 한일은행 등도 사업영역을 확대해 나갔어요. 





 1937년의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은 국내 금융기관들에게 전쟁자금의 모금을 맡도록 했으며, 이를 위해 대대적인 소비절약운동과 강제저축을 하도록 했으며, 저축운동을 통해 마련된 돈은 전시 국채 구입비용으로 사용했어요. 





 일제강점기에 전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발행되었던 채권들의 모습이에요. 






 1909년 중앙은행으로 설립된 (구)한국은행은 1911년 조선은행으로 이름을 바꾸고 그 역할을 이어갔는데, 조선은행은 만주와 한국의 경제를 통합하려는 일제의 의도에 따라 만주진출에 중점을 두었어요. 





 조선식산은행은 식민지의 산업금융을 늘리기 위해 1918년 농공은행들을 합병하며 만들어진 것으로, 일제의 산미증산계획으로 식민지 최대 금융기관이 되었으나 이후에는 전쟁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금융기관으로 변하게 되었어요.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9년 일본인의 농사와 이민을 도와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나 이후에는 장기대부를 하는 금융기관으로 변해갔어요. 





 1907년에 설립된 금융조합은 초기에는 반일감정을 누그러뜨리고 총독부의 정치를 해설하는 기능을 하였으나 이후 전시체제로 들어서면서 전쟁자금을 마련해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어요. 





 그 밖의 기타 금융기관으로는 조선저축은행, 무진회사, 신탁회사, 보험회사, 증권시장 등이 있었어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과 군대의 자금마련을 위해 독립공채를 발행하였으며, 1919년 독립공채조례를 제정·공포하여 1920년부터 시행했어요.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0년대에는 많은 은행들이 신설되었으나 1920년대에는 새로 설립되는 은행의 수가 크게 줄어들었으며, 이후 일제의 은행합병 정책으로 1945년 해방 당시 일반은행은 2개만이 남게 되었어요. 






 8·15 광복 이후 정부는 통화금융체제의 정비에 착수하여 자주적인 통화금융체제 확립을 위해 노력하였고, 1960~1970년대에는 정부주도의 경제발전을 위해 각 금융기관은 국내 자본 동원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1980~1990년대에는 금융자율화와 금융시장 개방이 이루어졌어요. 하지만 급변하는 국제 금융환경에서 경쟁력을 갖추지 못했던 한국경제는 1997년 IMF 외환 금융위기를 맞게 되었으며, 우리나라는 혹독한 구조조정과 자구 노력을 통해 이러한 위기를 극복해 낼 수 있었어요. 





 해방직후 물가는 급격하게 상승했으며, 이러한 물가상승을 억제하고 안정을 이루기 위해 정부는 한국은행을 설립하고 화폐개혁을 통한 통화제도를 정비했으며, 금융기관들의 정비와 은행법을 실시하는 등의 자주적인 금융제도를 수립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요. 





 1960년대부터 정부는 경제발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금융기관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반은행의 주식은 국가의 소유가 되었고 금융정책에 대한 책임을 재무부에 두었으며, 각 분야별로 목적에 맞는 특수 은행들을 설립했어요. 

 한편 1970년대에는 중화학 공업화를 위해 기존 은행의 예금에만 의존하던 방식에서 비통화금융기관과 증권시장의 활성화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어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금융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금융자율화가 시작되었는데, 이에 따라 여러 은행들이 신설되었고 5개의 시중은행이 민영화 되었으며, 정책금융도 중소기업과 저성장산업 지원으로 바뀌었어요. 이후 1990년대 금리자유화와 증권시장 개방이 되면서 일반은행은 대형화되면서 성장해 나갔어요. 





 오늘날의 금융산업은 빠르게 발전하는 IT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첨단전자금융서비스와 은행, 증권, 보험, 투신, 카드 업무 등의 제휴가 이루어진 종합금융서비스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어요. 





 1997년 말, 한국경제는 IMF 구제금융체제라는 위기상황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는 금융시장이 국제적인 수준의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고 대기업에 집중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어요. 이후 금융기관들의 자구 노력과 온 국민의 희생으로 금융권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단행되었고, 이후 금융업에 대한 개방화를 통해 국제적인 경쟁력을 높여나가고 있어요. 





 한국금융사박물관 3층의 마지막 부분에는 신한은행 홍보관이 마련되어 있어서 신한은행의 발자취와 연혁 등을 살펴볼 수 있도록 되어 있어요. 












 한국금융사박물관은 우리나라의 금융 역사를 한 자리에서 모두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으며, 특히 초등학생이나 중학생들에게는 뜻깊은 교육의 장이 될 수 있는 곳이에요. 

 한국금융사박물관에 관한 더 많은 내용은 다음번 포스팅에서 소개하도록 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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