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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

[서울 가볼만한곳]우리나라 금융발전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한국금융사박물관 첫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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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금융사박물관은 우리나라의 금융 발전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고, 일반인들과 학생들의 국내 금융사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1997년에 신한은행에 의해 설립된 국내 최초의 금융사 전문 박물관으로, 지난 2007년에 리모델링 작업을 통해 노후된 전시시설을 개선하고 영상과 체험을 늘려서 재개관한 곳이에요. 





 한국금융사박물관은 1, 2호선 시청역 3번출구나 5호선 광화문역 6번출구로 나가셔서 5분 정도만 걸어가시면 만나실 수 있어요. 단체관람을 원하시는 분들은 한국금융사박물관 홈페이지(http://www.shinhanmuseum.co.kr)에서 사전에 예약을 하셔야만 관람이 가능해요. 







 한국금융사박물관 관람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일요일이나 공휴일, 근로자의 날은 휴관이에요. 






 3층에 있는 한국금융사박물관 안내데스크 모습이에요. 





 3층 한쪽 벽면에는 한국금융사 연표가 적혀 있어서 우리나라 금융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해 놓았어요. 





 한국금융사박물관 안내데스크에서는 아래 사진과 같은 통장 모양의 물건을 주는데, 안을 확인해 봤더니 박물관에 대한 소개가 적혀 있더라구요. 통장으로 리플렛을 만들 생각을 했다는 것이 정말 기발하다고 생각되었어요.





 한국금융사박물관은 시대별로 전시관이 나뉘어져 있는데, 그 중에서 첫번째는 「전통시대의 금융전시관이었어요. 

 우리나라에서 지금과 비슷한 형태의 금융기관이 처음 설립된 것은 1897년의 일이지만 그 이전에도 금융거래는 존재했었다고 해요. 특히 조선후기에 농업, 상업,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상거래의 규모가 커지게 되었는데, 당시의 동전은 대규모로 원거리 거래를 하는데 있어서 운반이나 공급이 불편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금융제도나 금융기구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났고, 이 과정에서 생겨나게 된 전통시대의 다양한 금융업과 금융거래에 사용된 도구 등을 「전통시대의 금융」전시관에서 볼 수 있어요.  

 




 우리나라의 초기 금융의 모습은 국가에서 백성들을 돕는 구휼정책에서 시작되었는데, 시대에 따라 고구려 때는 진대법, 고려 때는 의창, 조선시대에는 의창, 사창 등으로 불렸어요. 이러한 환곡제도는 빈민구제책에서 재정확보책으로 성격이 변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백성을 수탈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어요.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계(契)는 여러 사람이 모여 공동의 재산이나 기금을 마련하고, 마련된 돈을 공동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거나,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등의 활동을 하던 상호 협동 조직이었는데, 계는 서민들 사이에서 민간 금융의 역할을 담당하며 발전해 왔어요. 

 거래문서는 개인 간 대차거래의 모습을 보여주는 문서를 말하는데, 재산과 관련된 거래문서에는 대부분 싸인이 들어있었다고 해요. 국왕이나 양반관료들은 문자형의 서명인 수결을, 글씨를 모르는 하위계층은 손바닥을 대고 따라 그리는 수장이나 수촌을 사용하였으며, 많은 문서에 동일한 서명을 수없이 해야 할 경우에는 그 번거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각압이라는 일종의 도장을 사용하기도 했다고 해요. 






 객주와 여각은 상인들이 모여드는 도시와 항구, 포구 등에서 상인간 물품 거래를 하도록 해주거나, 물건을 대신 팔아주고 수수료를 받는 중간상인을 말하는데, 객주는 위탁판매를 주로 하면서 숙박, 운송, 창고업 등과 같은 업무도 하였으며, 돈을 맡기거나 빌려주고, 환이나 어음의 발행과 인수 같은 금융업무도 담당했다고 해요. 






 이자는 삼국시대부터 존재하였으며, 고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널리 사용되었는데, 이자는 원금과 이자를 갚는 기간에 따라 장리, 월수와 일수 등이 있었다고 해요. 하지만 이자는 돈이나 곡식을 꾸는 서민들에게 부담이 되고, 높은 이율의 이자가 생겨나기도 해서 국가에서 이자를 법적으로 제한하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고려 경종은 이자를 1년에 33%로, 조선시대의 영조는 20%로 정하기도 했어요. 





  보부상(또는 부보상)은 봇짐장수인 보상과 등짐 장수인 부상을 합친 말인데, 보상은 주로 귀금속이나 장식품 등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니면서 판매하였고, 부상은 토기, 나무그릇 등과 같이 부피가 큰 일용품을 등에 지고 다니면서 판매했다고 해요. 이 보부상은 물품교환을 통한 상거래와 금융거래를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되고 있어요. 

 조선후기에는 상거래가 활성화되면서 동전을 대체할 지불수단이 필요하였는데, 그것이 환이나 어음과 같은 신용화폐였으며, 이러한 환과 어음은 근대적 형태의 금융기관이 등장하기 이전에 신용화폐로서 큰 기능을 했다고 해요. 

 외획은 지방관청에서 중앙관청으로 세금을 낼 때 지방관리가 상인을 통해 국고에 세금 납부를 조건으로 돈을 빌려주고, 상인은 그 돈으로 지방에서 물품을 구입한 뒤 한양으로 가서 그 물품을 팔아 세금을 국고에 낸 뒤 물품을 팔아 남긴 이익은 상인이 챙기는 형태를 말하는데, 이는 지방관청과 상인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떨어져서 점차 확대되었고, 1894년 갑오개혁시 조세의 금납화와 함께 전면적으로 행해졌다고 해요. 

 전당포는 물건을 맡기고 이것을 담보로 하여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금융업의 한 형태인데, 고려시대에는 전당국 또는 전포란이라고 불렸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전당포로 불리며 성업을 이루었다고 해요. 







 시변은 조선후기에 주로 개성상인들 사이에서 행해진 낙변이라는 독특한 이자계산방식을 사용한 단기금융으로 환전거간의 중개를 통해 이루어지며 결제는 반드시 월말로 정해져 있었다고 해요. 이러한 거래관행은 현대의 콜자금이나 단자회사의 자금거래와 같이 정교한 방식으로 당시 금융거래의 발달상을 엿볼 수 있어요. 

 송도사개치부는 고려시대의 수도인 송도(개성)의 상인들이 주로 사용하여 개성부기 또는 사개송도치부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이와 같은 장부기록법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서양의 복식부기와 근본 원리가 같고 서양보다 약 200여년 이상 앞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어요. 





 전통시대의 상인들은 산가지나 주판 등의 셈도구를 이용하여 계산을 하였으며, 그밖에도 조선시대의 열쇠고리였던 개금패, 돈을 보관하던 목제금고, 중요한 서류를 넣고 다니던 휴대용 서류가방, 상인들이 물건을 저울질할 때 쓰였던 휴대용 저울과 거래 문서에 찍던 각압, 봉인 등 다양한 도구들이 금융거래에 사용되었다고 해요. 





 이곳은 전통시대의 금융에 쓰이던 물건들이 어떤 것인지를 재미있게 설명해주는 곳인데, 물건의 대는곳을 앞에 있는 원판에 갖다대면 그것이 어떤 물건이며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를 설명해주는 코너에요. 





한국금융사박물관은 앞으로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우리나라 금융의 역사를 배우고 금융경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곳으로, 아이들이 금융이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니라 우리 실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는 곳인 것 같아요. 

 한국금융사박물관에 관한 더 많은 이야기는 다음 포스팅에서 전해드리도록 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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